本集9卷4冊,續集4卷2冊(全12卷6冊) : 四周雙邊 半郭 20 x15.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 x 21.1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낙행의 시문집이다. 아버지는 교리성탁(聖鐸), 어머니는 무안 박씨로 통덕랑 진상(震相)의 딸이다. 경상북도안동 출신. 밀암 이재의 문인으로 그는 『근사록(近思 錄)』․『심경(心經)』 등에 조예가 깊었다.1737(영조 13)년에 홍문관교리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추존문제로 무고를 받고있던 이재를 변호하다가 이해로(李海老)․신헌(申瀗) 등의 탄핵을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자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뒤 아버지가 광양(光陽)에 이배되어 죽자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냈다. 효행이 지극하고 문장으로이름이 났으며, 특히 제문에 뛰어나서 구제밀찰(九祭密札)의 미칭(美稱)이 전한다. 저서로는 『계몽질의(啓蒙質疑)』․『기법 질의(耆法質疑)』․『상복경전주소통고(喪服經傳註疏通考)』․『강록간보고의(講錄刊補攷疑)』 등이 있다. 호(號)는 본시 없었는데 그의 도서(圖署) 중 구사당(九思堂)이란 3자가 있었으므로 사림들이 구사당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한다.
이 문집의 간행경위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종제(從弟)인 김도행 (金道行)이 지은 유사(遺事)에의하면, 원집은 김도행이 『제산집(霽山集)』과 같이 편집하여 이상정의 교정을 받아 아들인 김시전(金始全)이 정사(淨寫)한 것으로기록되어 있다. 제산집이 1802(순조 원)년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와 동시에 간행되었거나, 그 이후로추정 된다. 속집은 원집에서 빠진 것들과 구사당에 관한 기록인 부록 등을 모은 것으로 편집은 역시 김도행과김시전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듯하고, 간행은 원집보다 뒤에 이루어진 것으 로 추정된다.
문집의 시는 지구(知舊)간의왕복창수와 산천(山川), 경물(景物), 고적(古蹟) 등을 소개로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서(書)는 경학, 성리학, 예학 등을 논변한 것이 대부분으로 「여이눌옹(광정) (與李訥翁(光庭)」은이광정의 문장(文章)․도학(道學)에관해 논변한 편지로 권만(權萬)과의 왕복서와 함께 구사당의학문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여권강좌논중용의의(與權江左論中庸疑義)」는 권만의 저서인 『중용의의(中庸疑義)』에서 의문 되는 점을 가려서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하여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접저의 「상복경 전주소통고(喪服經傳註疏通考)」는 『의례』 상복편의 경전주소에 대해 장별로 열거하여고증, 논변하고, 주소자(註疏者)의 인물에 대한 고증도 하고 있다. 「자경편사차(自警編私箚)」는 송나 라 조선료(趙善(王+寮))의 저서인 『자경편(自警編)』에 대해 사리에 맞지 않는 부분을 명의(名 義)에 입각하여 조별로 논평하고 있다. 「기의(記疑)」는 사서오경중의 해석이나 상제례(喪祭禮) 등에 관해 의문되는 점을 들어지적하고, 아울러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독역설(讀易說)」은『주역』을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를 설파한 것이다. 이광정과 권만 등이 “『중용』․『주역』은 서로표리(表裏)가 되므로 이 두 책의 뜻을 알면 형륙 (刑戮)을 면할 수 있다.”고하자 구사당은 군자의 행기(行己)는 오직 도(道)에 당연함만 볼 뿐 이라고 주장하고, 이 독역설을 지어 자신의 주역관을 피력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직불굴(正直不屈)의 지조(志操)를나타내고 있다. 「심체용설(心體用說)」은 심(心)의 체용에관해 논한 것으 로. 심의 체용은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록에는 1785(정조 19)년에완산 (完山) 류장원이 쓴 행장, 번암 채제공이 쓴 묘지명 1편, 그다음 종제(從弟)인 행도(行道) 가 지은 유사가 있다. 제문으로1766년 구사당이 죽은 해에 이태환(李台煥), 이상정, 이광정, 류도원, 이종수(李宗洙), 권병(權炳), 류장원, 삼종제 강한(姜漢), 종제 도행(道行), 생질이만운 (李萬運) 등이 쓴 것과 박손경(朴孫慶), 이상정, 이광정, 김종경(金宗敬), 권사호(權思浩) 등이 지은 만사가 차례로 실려 있다.